잇단 범죄 예고글까지 등장하며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죄송할 짓을 왜.....
범인을 제압한 '용감한' 시민들 중에는 흉악 범죄자가 있었다.
당시 이 직원은 부상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주민들을 도왔다.
"명백히 약자를 노린 살인은 '묻지마 살인'이 아닙니다"
유족들은 장례와는 별도로 경찰, 진주시 등과 협의를 계속할 예정이다.
"동일가치 노동 동일 임금"
누군가는 '나는 이 사회에 그런 정도의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지금까지 누려온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자 한다. 강남역에 모여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고 서로의 고통에 공명하는 여성들 앞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남성도 군대 가서 죽고 일하다 죽는 사회적 약자"라고, "남자 여자 싸우지 말고 화해하자"고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그렇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나중에"를 외친 대선후보와 그를 함께 연호한 이들이 그렇다.
아니, 네 말이 맞긴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소리를 절대 하지 않고 '여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마늘이다. 100일간 먹어보도록 하자. 여자들의 말을 끊지 말라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페미니즘 공부의 첫 단추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의 '한국 남자'가 보편적 차원에서의 '사람'으로 진화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말을 끊는 남자,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얕잡아 보면서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유명인의 삶과 연결될 땐, 이는 가십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본인은 밝힌 적도 없는데 언론이 전문가 발언을 더 해 기사로 다루면, 그것은 신뢰까지 얻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통된다. 현재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한 박근혜의 심리·정신적 상태를 분석한 기사들이 대표적인 예다. 전문가가 어떻게 단 한 번의 대면조차 없이 이토록 쉽게 '진단'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진단이 옳다고 한들 이를 언론에 공개적으로 밝히는 건 윤리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설에서 일어난 온갖 추악한 일들을 관성적으로 '인권침해'라 말해왔다. 그러나 대구시립희망원 사건을 보자. 2년 반 동안 123명이 사망했다. 이건 인권침해가 아니라 '학살'이라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저 과격한 표현을 쓰려고 하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시설의 역사를 돌아보면 부랑인이라는 집단을 '절멸'시키려는 학살임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학교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시민으로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는다(당연하지만 이것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습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존재하며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여기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여성혐오가 무엇이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성소수자는 괴물이 아닌 인간이며 그에 대한 혐오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간을 피부색과 출신지에 따라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한국이 누군가가 스스로의 의도와 무관하게 잠재적 피해자로, 또 잠재적 가해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곳이며 더 이상 그런 곳이 되지 않도록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칼로 사람을 죽이려면 어떤 상해를 저질러야 하는지 눈에 보이듯 훤히 알 수 있다. 또 그 끔찍한 사체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도 이입할 수 있다. 그 가녀린 피해자에 대해서, 같이 숨 쉬는 인간으로서 추모해야 한다. 여기서 나아가, 이 여성 피해자에게 그간 사회에서 잠재적 피해자로 느껴왔던 여성들이 감정이입하는 것도 매우 당연하다. 벌어진 사실은 끔찍하고, 그것이 자신이 될 수도 있었으며, 사회는 실제로 여성들에게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위협을 가해 왔던 것이다. 엄연히 우리는 여성이 실제 적대감을 느낄 수 있던 사회에 살고 있었고, 이 추모는 피해자와 같은 여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존중할 만한 시선인 것이다.
내가 이번 살인사건의 논의에서 우려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묻지마 살인'인가 '여성혐오살인'인가에 대한 양자택일적 논의방식의 한계이다.이 양자택일이 위험한 이유는 이 두 축 사이의 얽히고설킨 복합적 관계성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둘째, '여성혐오'에 대한 지극히 제한적인 몰이해를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혐오'가 마치 살인이나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만 실행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여성혐오'는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얼굴만이 아니라,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운 은밀한 방식으로도 작동되고 있다. 여성을 매우 우대해주는 것 같은 소위 '신사도'의 근원적인 인식의 출발점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즉,열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이해) 은밀한, 그러나 강력한 '여성혐오'이다.